• 최종편집 2023-03-22(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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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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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바른 신앙을 위하여
    요한일서를 쓴 사도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 영지주의 이단이 교회에 파고들어 와 교인들의 신앙을 위협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은 매력적인 면이 있어서 여기에 빠져드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요한은 이 영지주의 이단과 맞서 싸우면서 성도들에게 이단을 분별하는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관해 정확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영지주의 이단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성육신)을 시인하는가 부인하는가로 이단 여부를 분별하였습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만이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은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인 신앙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고 소유할 수 있음은 큰 축복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통해서 성경을 바로 배우고 훈련해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관련된 책을 찾아보든지 그 분야의 전문가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수고가 필요 없고 그냥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웬만한 것은 다 알 수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라 듣고 싶은 음악을 모아서 듣기도 합니다. 유튜브의 세계에는 별의별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종이로 된 정보를 잘 보지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잘 정리해 올려놓으니까 굳이 종이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유튜브는 유익하기만 한가요.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유튜브 중에는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이거나, 검증되지 않은 근거 없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각한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성경 공부를 할 때는 더욱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단 사이비 세력은 유튜브를 통해 자기들의 교리를 선전합니다. 그럴싸하게 포장했기 때문에 여간해서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 성경 공부를 하는데, 듣는 분이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습니다. 같은 주제로 유튜브에서 들었던 내용과 저의 강의가 너무 달라서 혼란스럽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상한 유튜브를 본 모양입니다. 또 요즘은 유튜브에 숏츠 영상이 많이 올라옵니다. 숏츠엔 유명 설교자의 설교 한 토막만 편집하여 올린 영상들이 많습니다. 이는 설교자의 의도나, 설교의 앞뒤 문맥과 상관없는 편집일 수 있습니다. 편집자의 편향된 의도로 만들어진 비슷한 내용의 숏츠 영상을 알고리즘으로 매일 보면서, 자신의 확증편향을 더 굳어지게 합니다. 이단에 가지 않아도 이단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험상궂은 얼굴에 뿔이 달리고 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달려드는 게 아닙니다. 광명의 천사로, 친절한 사람으로, 때로는 유튜브와 같은 문화의 도구를 통하여 접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별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라고 권고합니다. 유튜브를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유튜브가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신앙의 방법은 신뢰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성경을 배우고 바른 신앙의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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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한 사람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목회 현장에서 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대하며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개척 목회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사모와 단둘이서 드리던 새벽예배 시간에 첫 번째 교인이 될 한 사람이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반가움과 동시에 텅 빈 예배당에 실망하고 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그 한 사람이 다음 주일에 한 가정을 데리고 와서 등록했을 때 온 천하를 얻은 듯 기뻤습니다. 반면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가 술렁이고, 겨우 몇 명 모였던 교인들이 흩어질 때는 마음속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울기도 하고, 또 웃기도 합니다. 역사도 한 사람을 통해서 발전돼 왔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해서 퇴보하기도 했습니다. 아담이라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사망과 저주와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반대로 인류의 가장 큰 전환과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구원의 사건도 예수님 한 분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시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한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을 열면 눈길을 끄는 영상들이 화면에 뜹니다. 그중에는 찾아보려고 생각했던 정보의 화면도 있습니다. 마치 제 생각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제 생각이 털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언젠가 딸아이가 저의 핸드폰을 사용할 일이 있어서 유튜브를 열었는데 숏츠에 덕스럽지 않은 영상이 몇 개 걸려있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난 본 적도 없는데 이런 영상이 왜 자꾸 뜨는지 모르겠어”라고 했더니, “아빠가 안 열어 봐도, 그 영상 화면에 눈길을 오래 머물고만 있어도 뜬다”라고 했습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기계가 저의 행동 패턴뿐 아니라, 숨겨진 마음까지도 다 읽고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데이터의 힘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반복됩니다. 그 행동을 데이터화 해서 엄청난 양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을 만듭니다. 이 알고리즘을 미디어에 장착해 사용하는 것이 AI 인공지능입니다. 그 인공지능이 휴대폰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나의 행동의 방향을 알고리즘으로 예측합니다. 한편으로는 편리하지만, 한편으로는 찜찜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예측 시스템인 ‘갓데이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 속에는 역사의 시작과 끝, 그 이후 영원까지의 정보가 다 들었습니다.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아야 복이 있는지 다 들어 있습니다. 갓데이터는 빅데이터로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내면과 영적인 일들까지 모두 예측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가장 바르고 복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빅데이터로는 분명히 절망이요, 사망으로 예측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새로운 삶으로 물줄기를 바꾸어 살아감으로써 새로운 존재 갓데이터가 보증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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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2
  • 인생에 대한 단상
    돈은 벌어도 늘 모자라고, 그 많은 세월과 무수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뭐 하나 뚜렷하게 해 놓은 것은 없고, 대단한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면서 늘 허둥대며 돈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며 너무나 버겁게 살아갑니다. 육체는 현실을 살기에 돈이 필요하고, 영혼은 돈이 아니라 사랑을 원하지만 결국은 돈에 시달리고 사람에 시달려서 육체와 영혼 중 어느 한 부분도 채워지지 않은 채로 허덕이는 것이 인생입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서 1:8)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10)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부와 가난이 수시로 교차하는 천국과 지옥의 공존지대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천국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지옥처럼 고통스럽게 살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천국처럼 행복하게 살아야 할 소중한 인생을 지옥처럼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원인이 있고 답이 있습니다. 몸에 힘이 없고 기운이 없는 것이 몸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인 것처럼, 현재 자신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치료받아야 하는 것처럼, 인생이 아프면 인생 병원에서 진단받고 처방받아 인생을 치료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낯선 곳을 처음 갈 때 길을 알면 쉽고 길을 모르면 어려운 것처럼, 우리 인생도 길을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내 인생 중 과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꼭 이렇게 현재의 방식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통해서 인간을 진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남은 인생은 행복과 소망으로 가득 찬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죽음 앞에 설 때에도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만족스러운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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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2
  • 화무십일홍
    드라마 카지노의 한 장면을 보면, 정팔(배우 이동휘)이 무식(배우 최민식)에게 ‘권무십일홍’ 이라며 “열흘 동안 피어있는 꽃은 없다”라고 유식한 척합니다. 그 말을 무식이 받아서 ‘화무십일홍’으로 정정해줍니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 즉 인생 부귀영화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남송의 시인 양만리의 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내용의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6~8) 아무리 잘 나가는 인생도 언젠가 풀의 꽃처럼 떨어지고 쇠잔할 때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육체를 너무 자랑하지 말고, 늘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심장이 2배 이상 튼튼하여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넜다는 조오련 씨도 5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이봉주 씨도 근래 허리 통증으로 투병하며 “잠시라도 뛰어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해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세계적인 모델이며 패션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크리시다 로드리게스는 암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임종 직전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내 집에 디자인이 다양한 옷과 신발, 장신구 등 비싼 물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의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다.” “은행에 아주 많은 돈을 모아 놓았다. 그러나 지금 내 병은 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 없다.” “내 집은 왕궁처럼 크고 대단한 집이다. 그러나 나는 병원 침대 하나만 의지해 누워 있다.” “나는 별 5개짜리 호텔을 바꿔가며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병원의 검사소를 옮겨 다니며 머물고 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화무십일홍”과 같습니다. 이런 인생의 이치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도 들의 꽃처럼 시들고 마르게 됩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9개 국어를 마스터한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고, 당시 최고 권력자인 남성 2명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런 그녀도 화려한 침대 위에 독사를 풀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마를린 먼로는 전 세계의 남성들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마음마저 훔쳤지만 36세에 꽃처럼 갑자기 사그라져버렸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영웅호걸로 한 시대를 풍미해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우리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God-less) 인생의 결국은 “허무”만이 남습니다. 인생이 영원한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시며, 우리를 영원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하나님을 만난다면 영원한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들판에 피는 꽃과 같은 짧은 인생임을 알고 세월을 아낍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살아갑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영원히 복이 될 것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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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8
  • 시간이 빠르다고요? 시간이 답답하다고요?
    2022년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연세 드신 분은 세월 빠르다고 불평들 하지요. 또 포스트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신냉전의 국제정세로 인한 깊은 경제불황 등으로 인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은 지금 시간이 너무 답답하다고들 합니다. 가파른 금리상승, 집값 하락에 ‘휴~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답답한 시간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빠르다구요? 또는 시간이 답답하다구요?”라고 되묻는 한 소년을 소개합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만난 17세 홍원기 소년입니다. 별명은 ‘시간을 달리는 소년’인데, 선천적으로 빠르게 노화되는 ‘소아 조로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병을 앓는 환자의 평균 수명은 15세. 전 세계 120명, 우리나라에는 단 한 명뿐인 희귀병입니다. 목사님 아들인 원기 군은 다섯 살에 소아 조로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유튜브는 현재 23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인기 유튜브입니다. 2년 전 처음 유튜브에서 본 15세 소년의 얼굴과 몸은 가냘팠지만, 그에게서 포기, 원망, 절망, 좌절 같은 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병 때문에 원망하기보다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제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인기 유튜버로 즐겁게 살다 보면, 저도 멋진 어른이 될 수 있겠죠. 여러분도 모든 순간, 삶의 매시간을 사랑하세요” 어릴 적 철없는 친구들에게 외계인 같다고 놀림 받을 때면 속이 상했지만, “하나님 왜 이렇게 절 만드셨냐”라고 불평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죽음의 두려움이 닥쳐올 때면 눈물을 흘리곤 하지만, ‘나도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며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고 합니다. “원기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항상 제 곁에서 지켜봐 주시고 힘이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니?” 이 질문의 답변은 재미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머리카락 많이 자라게 해주세요. 머리카락 생기면 저도 염색을 꼭 한번 해 보고 싶거든요” 소년의 버킷 리스트는 ‘머리카락 갖기, 여친 만들기, 유튜브 구독자(욘니와 치애) 100만 되기, 아빠랑 영국 가서 손흥민 선수 경기 보며 응원하기’라고 합니다. 소년의 유튜브를 본 후 2년이 지났습니다. 소년에게 2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얼마 전, 한 방송사의 <뜨겁게 안녕>이라는 프로그램에 소년의 가족이 나왔습니다. 소아 조로증 환자에게 17세는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안녕 하우스>에서 아빠가 미리 20세 생일 케익을 준비하고, 가족이 함께 부르는 노래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즈음,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린다’, ‘시간이 답답하다’ 이런 투정(?)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감사만 해야겠다 다짐합니다. 아들이 더벅머리를 하든, 꽁지머리(+염색)을 하든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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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8
  • 커피에 세례를 내려주다
    박해를 받았던 커피: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가 서양 음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커피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서 먼저 음용되었고 특히 이슬람 종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15세기 무렵 커피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수도사들을 통해 메카에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야간 종교의식에서만 커피를 마셨으나 이후 종교의례행사 등에서 빠짐없이 등장하였고 메카 사람들은 이를 통해 커피를 접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커피 하우스가 생겨나면서 더욱 대중화되었는데, 당시 메카(1511년)의 새로운 총독에 임명되었던 카이르 벡 (Khair Beg)는 이러한 일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는 대화를 나누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총독은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을 비웃는 시를 쓴 무리를 잡아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총독은 사람이 아닌 ‘커피’에게 벌을 내리는 황당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메카 시내의 모든 커피 하우스에 폐업 명령을 내렸고, 이를 어기고 커피를 마시는 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당나귀에 거꾸로 매달린 채 날뛰는 당나귀 위에서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커피 박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철회되었는데, 바로 이슬람교의 최고 지배자 술탄 덕분이었습니다. 술탄을 포함한 많은 궁정 관료들이 이미 커피를 애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독에게 커피 금지령을 철회할 것을 명하였고 즉시 메카에서 다시 커피가 허용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커피에 세례를 내려주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초기에는 이슬람에서 건너왔다는 사실 때문에 ‘이교도의 음료’, ‘이슬람의 와인’으로 부르며 커피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를 한 번 맛본 이들은 그 맛에 빠져들어 너도나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로마에서 커피가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부 성직자들과 광신도들이 주체가 되어 커피를 탄압하여 커피가 기독교 세계에서 추방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커피는 이슬람의 음료이며, 곧 ‘사탄의 음료’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이 커피를 마시는 행동은 사탄이 만든 덫에 빠지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커피를 금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전해 들은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사탄의 음료가 궁금해졌고 커피를 맛보고 싶어졌습니다. 커피 맛을 본 교황은 뜻밖의 답변을 내린다. ?“사탄의 음료가 어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느냐? 당장 커피에 세례를 내려 사탄을 쫓아내고 이를 진정한 기독교의 음료가 되었음을 명하노라.” 이로써 커피는 교황에게 인정받아 세례까지 받은 기독교의 음료가 되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커피는 죄가 없었습니다. 커피는 밥이나 과일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은총입니다. 커피가 문제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선한 사람이 마시고 선한 일을 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피를 거룩하게 하는 길은 커피에 세례를 베풀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바르게 거룩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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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12-14
  •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오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든, 일을 하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예배당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에서 엔데믹 세상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동안 모든 생활 속에서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혹독한 경기침체가 시작됐다고 예상합니다. 전쟁과 신냉전 상황은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게다가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 재앙까지,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지 모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전쟁, 기후 변화보다 더 우리 인생에서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떠한 것에 매여 사는 인생이 가장 어리석은 인생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좀 느리고 부족해도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꼭 붙들고 동행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극복할 수 없던 것들을 극복하게 합니다.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을 넘을 수 있게 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았던 마음의 언덕을 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등을 떠밀기 때문입니다. 세찬 비바람과 마주하며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 한 발짝도 나가기 힘듭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앞으로 쭉쭉 나가게 됩니다. 비행기도 바람을 타면 더 빨라지고, 바람을 거스르면 비행시간이 길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등 뒤에서 우리의 가는 길을 밀어주는 바람과 같습니다. 물동이를 버리고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삶의 예배자로 살았던 수가성 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 다 버리고 뽕나무에 오른 세리장 삭개오. 이렇게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는 사람마다 넘을 수 없었던 자신의 언덕을 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본 사람은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승리를 맛본 날,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에 기뻐한 날, 가정에 아이가 태어난 날 등 영광을 본 그 순간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됩니다.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치킨집 사장님은 홀에서 TV 중계를 보던 손님들에게 ‘지금 먹고 있는 것은 공짜!’라고 외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누린 사람들도 그렇게 변화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렸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인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다른 이들에겐 매우 인색한 우리 모습을 봅니다. 은혜받은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병폐입니다. 그리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됩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가장 놀라운 사건은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예배자로서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할 때 세상은 지금보다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12-07
  • 적(敵)은 안에도 있다
    2015년 3월 24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독일 뒤셀도르프 국제공항으로 가던 저먼윙스 독일 여객기가 프랑스 남부 알프스 산맥에 추락하면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한 결과 부기장이 일부러 알프스 산에 충돌시킨 자살비행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사고 여객기의 부기장은 기장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조종실 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그가 여객기를 알프스에 충돌시키기 위해 비행했던 8분 동안 아무도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9.11테러 이후 전 세계 항공사들이 여객기 납치 예방을 위해 조종실 문을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는 절대로 열지 못하는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9.11테러 이후 항공업계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했지만 ‘내부의 적’을 막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적은 안에도 있다’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조정은 일본을 살피기 위해 황윤길과 김성일을 파견했습니다. 일본을 탐색하고 돌아온 황윤길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평화를 좋아했던 조정에서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채택했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조선은 전쟁을 대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으로 7년간 국토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부녀자가 왜군에게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적은 밖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선조를 이은 광해군은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청(淸:후금)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명나라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며 능양군(인조)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분노한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는데 그게 병자호란입니다. 신하들은 인조를 모시고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인조는 청 태종 앞에 삼궤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36년간 일제의 속국이 되는 한일합병도, 수많은 죽음과 전쟁 고아를 만들어낸 6.25 전쟁도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과 자식들 간의 분열에 있었고,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 아들 간의 분열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내부의 적 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신앙도 망하게 하는 적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새사람이라도, 여전히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적은 이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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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11-30
  • 감사 주일의 단상
    이번 추수 감사 주일에는 감사를 글이나 그림처럼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재능으로 표현해 보자고 광고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지구상에 하나뿐인 작품들이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글자 수를 고려해서 그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순례자의 여정과 고백 ○○○ 권사 알람 소리에 새벽 단잠이 깼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새벽을 어둠의 한 발악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제일 먼저 성경을 몇 장 읽고 나서 어둠 속에서 교회로 향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마음을 쏟아내고 교회를 나서면 어느새 어둠은 물러가고 하늘에는 별 대신 솟아난 동녘 해와 탁 트인 쾌청한 하늘이 보입니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조용한 거리를 걸으며 하루 일과를 되뇌어 봅니다. 보람찬 하루도 있지만, 그저 그냥 지나간다고 할까. 정말 멋이 없는 하루를 보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많은 기도와 감사,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은혜요, 내 마음의 고백이요, 내 입의 노래입니다. 하루의 마지막은 꼭 성경을 몇 장 읽고 시편 23편 말씀을 암송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2).” 이 말씀을 계속 되뇌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하루는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젊을 때는 이 연결을 잘 몰랐지만, 이제 나이 연한이 기울다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이 연결이 참으로 좋습니다. 연로하신 권사님께서 평범한 일상을 덤덤히 표현하신 글입니다. 이 글뿐만 아니라, 작품 하나, 하나를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 주인(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는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한 감사도 상대방을 아는 마음, 곧 그를 이해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아침까지 새벽기도를 하시고 걸어가시는 권사님의 뒷모습과 그 일상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권사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줄 “연한이 기울다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이 연결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 부분이 와 닿습니다. 제가 작품을 내신 분들을 알고 이해하고 읽기에 더욱 감사가 깊어집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자연이 눈에 들어와서 깊은 감동을 하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뒷동산을 산책하다가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와 깊게 물든 나무들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권사님의 연세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나이 때문인 듯 합니다. 어찌 되었건 감동, 감탄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동받고 감탄하며 감사하는 것이 나이 때문이라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두근대면 무죄! 설레지 않으면 유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일상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또 목회자로서 교우들과의 만남에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하여, 이 일을 통하여, 이 만남을 통하여 어떤 선물을 예비하고 계실까! 두근대면 무죄! 아무런 기대도 감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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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비판보다 어려운 것
    많은 분들이 정의로운 비판을 하면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 냉철한 지성을 자랑하며 투사처럼 판단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철들면서 비판하는 것이 제일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비판이 옳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비틀거리는 사람을 비난하지만, 그가 구타당한 모습은 보지 못합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린 볼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로 사람을 상대해야 합니다. 누구도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되고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보이는 것만으로 비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보이는 것 하나만 가지고 곧바로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동 선전, 사기, 이간질에도 쉽게 넘어갑니다. 좀 더 볼 수 있을 때까지 잠깐 판단을 멈추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마7:1)”라고 하셨습니다. 비판하는 자는 같은 내용으로 비판받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유명인 중에 과거에 자신이 한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와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좋은 말, 의로운 말만 골라서 해야만 하는 목사로서 가슴이 뜨끔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경우에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사회가 비판 없이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나 정당한 비판이 없다면 잘못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실패한 지도자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역사는 퇴보하며 나라는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민주적 방식의 선거제도는 정당한 비판을 통하여 잘못된 지도자는 퇴출하고 잘하는 지도자는 더욱 잘하도록 기능합니다. 또한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정당한 비판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린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비판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며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비판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인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 사랑이 없는 비판은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책망은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때리는 어머니도 맞는 아들도 함께 눈물 흘리며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이 없다면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판단을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비판보다 어려운 것은 사랑으로 감싸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연습하고 길러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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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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