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4(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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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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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시원한 생수를 마시며 생각하다
    장윤석 목사 < 하늘사랑의 교회>     여름은 무더운 날씨로 인한 갈증 때문에 누구나 물을 많이 찾습니다. 사람 몸의 7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하다는 주장은 정설입니다. 특히나 운동량이나 활동량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이 물을 마셔 주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 꼭지를 틀어놓고 고개를 젖혀서 그냥 시원하게 수돗물을 마셨습니다. 그때 누군가 똑똑한 척 말했습니다, “너 그거 알아? 어느 나라는 물을 사 먹는다더라” “뻥 치시네~ 봉이 김선달이냐, 차라리 공기도 사서 마신다고 해라” 이랬던 시절이 있습니다. 이제는 반드시 정수된 물이나,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합니다. 이처럼 매일 마시는 물의 변화는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 외에도 물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많이 줍니다. 철학자이자 수필가였던 고 안병욱 교수는 “물은 변화와 적응의 천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은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나고, 날씨가 더워지면 수증기로 올라가고, 하늘에서는 구름으로 떠 있다가 또 땅으로 내리고, 추우면 얼음이 되며 자유자재로 변신합니다. 물은 흐르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있으면 돌아서 가고, 땅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조용히 넘쳐서 흐릅니다. 여러 환경에 잘도 적응합니다. 정말 변화와 적응의 천재입니다. 또 물은 약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합니다. 홍수에 다리도 집들도 다 떠내려가 버립니다. 물로 불을 끄기도 하지만, 물은 쇠를 녹슬게 해서 결국 무너뜨립니다. 가장 배울 것은 물은 언제나 낮은 데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물은 결코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물일수록 더 큰 힘이 생깁니다. 낙차가 큰 폭포나 많은 물을 방류하는 댐에서는 큰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섬긴다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많은 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행복으로 옮깁니다. 물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엄청난 운동에너지가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가를 좋아합니다. 무더운 여름, 계곡에 흐르는 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그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휴가 때 계곡 펜션이나 방갈로에 묵으면 시원한 물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님에도 그 속에서 단 몇 시간만 자도 몸과 마음이 개운해집니다. 이상하지요. 다른 소음은 숙면을 방해하는데 물소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은 모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의 생명에도 꼭 필요합니다. 물의 변화와 적응, 그리고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능력, 그 소중함, 이 모든 것들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물은 예수님의 성품을 똑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구원의 생수이십니다. 이 생수를 마음껏 마시면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사막같이 메마른 우리 영혼이 물댄동산같이 회복되길 기대합니다. 흐르는 맑은 물과 같이 모든 사람, 모든 환경에 생명을 주는 신앙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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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4
  • 목회단상> 나누고 베푸는 사람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생을 세 가지 곤충에 비유했습니다. 가장 먼저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줄에 걸려들면 잡아먹는 거미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개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일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꿀벌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날아다니며 꿀을 모읍니다.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며 수술과 암술을 붙여주고 열매를 맺게 도와줍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남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공동체에 큰 유익을 주는 사람이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꿀벌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나누어주신 생명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성례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우리도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나누고 베풀고자 하는 다짐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꿀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받은 생명과 사랑을 서로 나누며, 여기저기 다니며 받은 은혜를 나누며 베푸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25년 정도 목회를 하면서 꿀벌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스도, 빌레몬, 루디아와 같은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로, 어떤 분들은 기도로, 어떤 분들은 봉사함으로, 어떤 분들은 목회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줌으로, 어떤 분들은 변함없이 한결같은 지지로 힘이 되어 줍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분들 때문에 힘들고 외로운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목회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사역에 힘이 되어주는 꿀벌 같은 성도들이 있었기에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도 벌써 한 해의 절반을 지나면서 다시금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며 사랑의 빚진 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성도는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대상인데, 나는 오히려 사랑과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뭔가를 하자고 하면, 신뢰하고 물심양면 아끼지 아니하고 지지하며, 저의 연약함을 채우고자 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생명을 나누어 주셨는데, 성도들은 꿀벌처럼 저렇게 아낌없이 섬기고 베푸는데, 나는 평생에 나눈 것이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저녁부터 필리핀 선교팀이 선교지 여름성경학교를 위해서 출발합니다. 인천 CCC 청년들과 우리 청년부가 영종 지역 도시전도를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오늘까지 사역합니다. 교회의 여름 행사들을 준비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성찬을 받으며 다짐해 봅니다. ‘꿀벌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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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7-10
  • 목회단상> 기도 -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부르짖는 기도에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도시와 마을마다 십자가가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동력은 기도입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습니다. ‘주여 삼창’과 통성기도(부르짖는 기도)는 한국교회의 열정과 부흥의 핵심을 이룹니다. 과거 새마을 운동의 노랫말에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서 울리던 새벽 종소리와 나라를 위한 통성기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교회의 새벽기도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 산업현장으로 나가며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모습은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무기력한 모습의 원인은 그런 기도를 잃어버린 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광은 부르짖는 기도가 회복될 때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르짖는 기도를 수준이 낮은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귀가 안 먹었는데 왜 이렇게 소리쳐야 하나?”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 수준이 낮은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며, 10분도 채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고 뜨겁게 마음을 쏟아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우렁찬 합심기도 소리는 큰 권능이 있어서 귀신들을 떨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성에는 힘이 있습니다. 평소에 자신 있게 강한 발성으로 기도하지 못하면, 갑작스러운 기도 요청에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발성기도에 훈련된 사람은 강력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일들은 소리(발성)로 이루어집니다. 설교, 찬양, 기도, 전도, 간증 모두가 그렇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훈련을 지속하면, 찬양과 기도가 힘 있게 나오며, 답답함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문화가 아니라 성경이 강조하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성경에는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명령과 그 응답에 대한 약속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33:3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한 강력한 도구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라면, 교양 있게 “안녕하세요, 거기 지나가시는 분, 지금 바쁘세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좀 건져주실래요?”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큰 소리로 “사람 살려!”라고 외칠 겁니다. 우리는 환난 때에 전심을 다 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광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르짖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와 부흥회, 성경학교 등 여름 행사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매일의 새벽 기도, 또 여름 행사 준비를 위한 40일 저녁 기도에 동참하여, 함께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늘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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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6-26
  • 목회단상> 책임과 배려의 자세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성도는 두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 시민권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시민권입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성도로서 나라를 위하는 길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어린 시절 해 질 녘 동네 풍경을 그려 봅니다. 공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습니다.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어 갑니다. 엄마가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아,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 ○○이가 얼른 엄마 따라 들어갑니다. 이런 상황이면 ○○이가 아직 어린 나이일 겁니다. 열 몇 살만 먹어도 엄마가 부른다고 금방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 지금 상황을 그냥 관둘 수 없습니다. 하던 게임이라도 끝나고 나서 들어갑니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곧 갈게요, 먼저 드세요”라고 하든지, 저녁을 안 먹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가 자기 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엄마가 부릅니다. 그때 공까지 가지고 엄마 따라 집으로 간다면, 친구들까지도 게임을 못하게 됩니다. 그때 엄마를 따라가더라도 공은 친구들에게 놔둘 수 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이 있는 겁니다. 나이 들수록 자신의 판단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뜻은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며,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거나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도 책임질 부분은 지는 것이 어른입니다.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누군가 책임 있는 희생을 치른 까닭에 오늘 우리가 민주사회의 혜택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 일에 기여도 없이 찾아온 좋은 시절이 내게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시국에 대한 책임감으로 각자의 소신을 표현하는 분들을 존중합니다. 자신들의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시대의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진영을 떠나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아쉬움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정죄하는 태도는 아쉽습니다. 같은 시국을 두고도 어떤 분들은 큰 위기감을 가지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분들은 그 정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두 명의 기독교인이 각자의 신앙 양심을 가지고 한 사람은 왼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나만이 옳다고 기도해서 하나님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완전히 옳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 기초 위에서 건강한 사회를 위한 법치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저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나라 사랑을 실천하되,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동시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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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6-19
  • 목회단상> 편한 길보다는 평안의 길을
    장윤석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새벽기도 인도를 다른 분에게 맡길 때면, 새벽기도 시간에 ‘오늘은 아침까지 푹 좀 쉬자’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잠시 편할 수 있겠지만,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 예배를 참석하고 잠시라도 기도를 하고 나면 평안합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언제나 육신이 편한 길보다는 사명에 합당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편한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과 비교해 보면 세상은 살기 더 편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편안함이 아닌 평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은 몸을 편하게 해줄 수 있지만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평안은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평안으로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편안함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유를 배달시켜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하면 나약해집니다. 신앙생활도 너무 편하게만 하려고 하면 신앙이 나약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강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중에 신앙의 야성을 회복합니다. 광야는 불편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곳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생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런 기적들을 경험하면서 물질과 환경을 초월하는 하늘로부터 주신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지금 사방이 거친 광야와 같은가요? 많이 불편한가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 보세요. 더욱 큰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공군 전투기가 추락했습니다. 조종사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추락 원인이 조종사의 실수였습니다. 베테랑 조종사였던 그가 비행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암 투병을 하던 어린 딸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와 직장을 한꺼번에 잃은 그는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빠가 하늘을 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딸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탐사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고 달 탐사선의 선장으로 발탁됐습니다. 1969년 그가 탄 아폴로 11호는 드디어 달에 착륙했습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으로 기록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닐 암스트롱입니다. 그는 실패한 비행기 조종사였고 꿈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여 우주비행사가 되어 더 놀라운 성과를 이뤘습니다. 하늘을 잃었지만 우주를 얻었습니다. 혹시 실패하셨습니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힘드십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세요. 놀라운 평안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평안을 안고 일어나 다시 도전해 보세요. 잃은 것보다 더욱 큰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너무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명의 길은 편한 길은 아니지만 그 길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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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6-05
  • 목회단상> 더 빛과 소금으로!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가 밖에서 들리는 군중들의 함성을 듣고 신하에게 “폭동이냐?”고 물었더니, 신하가 “아닙니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궁궐 밖과 궁궐 안의 온도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사람을 임명하고 법안을 강행 처리하면서,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는 프랑스 귀족들처럼 ‘왜 사람들이 저렇게 반대하는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권력의 안과 밖에서 느끼는 온도 차이일 것입니다. 통치자가 구중궁궐 속에 갇혀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시점부터 그 나라는 명운이 기울게 됩니다. 한때 몽골족이 세계를 정복하며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몽골의 왕(칸)은 백성들 속에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런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교회도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크면 세상 속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해도, 어려운 사람들을 대가 없이 도와주는 곳은 교회입니다. 나라가 해야 하는 일을 교회가 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한말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들고 와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개화를 주도했습니다. 해방 이후 교육과 복지는 주로 기독교가 맡아 왔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버려지고 굶어 죽는 이들을 교회가 나서서 챙겼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지역아동센터와 다문화 지원센터를 운영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어려운 이웃들의 수도·전기 미납 공과금을 조건 없이 대납해 주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봉사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돌봄도 교회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착한 일은 나라조차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관련 기사와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것을 봅니다. 일부 교회의 비리나 심지어 이단 교회의 반사회적 행위까지 교회인 양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 불에 기름을 붓듯 비난은 금방 확산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도 차이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그렇게 나쁜 왕은 아닙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소문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쁜 짓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더 많이 저질렀습니다. 루이 16세는 의회에 평민을 참여시킬 만큼 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가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정말 세상에 손가락질받을 만한 교회는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위선자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 강한 빛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부패할수록 더욱 소금의 맛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 밝은 빛을, 더 맛을 내는 소금을 지금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 긍휼, 섬김으로 주변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더 빛과 소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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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5-29
  • 목회단상>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하라
    장윤석목사<하늘사랑의 교회>     일반 자동차의 엔진이 분당 4천 회전을 한다면, 고급 경주용 차는 분당 1만 회전을 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아침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엔진을 '분당 1만 회전'으로 올리고, 밤에 침대에 쓰러질 때까지 그 속도를 유지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의 소중하고 조용한 시간을 거의 허용하지 않습니다. 분주함은 영적 성장의 적이며,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지칭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성도는 남들과는 다른 북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 같습니다. 그 북소리를 들으려면 시간을 헌신해야 합니다. 쓰다 남은 시간 말고, 미리 떼어 놓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멈추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일기를 기록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여기서 일기는 영적인 기록으로서, 오늘의 경험,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IVP)는 일기 쓰기가 영적 발전에 큰 진전을 가져다준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점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로 인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일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결정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습니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어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멈추고 느려짐 속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시간 동안 우리 영혼은 안식을 누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향기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고요히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활동이 교회와 관련된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상시에 익숙했던 구절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딱 맞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 구절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로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이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시점에 성령님이 그 구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살 돈이 없을 때 이웃이 음식을 갖고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공급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슬픔을 이해하고 우리를 위로하려고 애쓰며 안아 주는 친구의 품속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삶의 속도를 줄일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4-05-16
  • 목회단상> 온전한 순종의 영역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창세기 1: 28절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순종의 범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은 교회 안에서의 순종을 넘어서 모든 창조의 영역 속에서의 순종이어야 합니다. 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온전한 순종이 아닌 반쪽짜리 순종에 그치고 맙니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과 일, 세상 속에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 문화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컨대 공부하는 사람은 학문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연구함으로 그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문화명령의 실천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죄악된 일, 거룩지 못하고 더러운 일, 피해야 할 일, 열등한 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거룩한 일, 우등한 일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세상 일은 필요악으로 어쩔 수 없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일이 다 거룩한 일이며, 만인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온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교회에서뿐 아니라 집에서, 부엌에서, 작업장에서, 들판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직업)이 하나님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문화명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의 일상의 영역을 거룩하게 바꿉니다. 매일 매일 가장 좋은 고기와 뼈, 그리고 싱싱한 야채로 김치를 담는 소문난 곰탕집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곰탕 설렁탕 장사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언제나 손님을 예수님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장사를 합니다. 좋은 뼈는 10시간을 고으면 뽀얀 국물이 나온답니다. 어느날 뼈를 고았는데 누런 국물이 나왔습니다. 뼈 가게 주인이 실수로 좋지 못한 뼈를 납품한 것입니다. 뼈 가게 주인은 사과하며, 커피 프림을 타면 뽀얗게 된다며 오늘만 그렇게 장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못 먹는 뼈도 아니고 맛도 큰 차이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재료가 나빠서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는 안내를 붙이고는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충성입니다. 눈 속임하지 않고 주께 하듯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곰탕 설렁탕 파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 설렁탕집 사장님은 지방에 사는데, 매주일 서울에 있는 본 교회로 나간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는 미식가라, 뭐가 맛있다 하면 서울도 가고, 광주도 찾아갑니다. 밥 먹기 위해서도 이렇게 다니는데, 예배드리러 왜 못갑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 모습이 예배에도 충성되고, 삶에서도 충성된 균형잡힌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분의 순종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곰탕을 팔면서도 순종하고 있습니다. 식재료로 더 맛있고 더 건강한 먹거리를 개발하여 삶을 풍성케 하는 문화명령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 문화명령에 순종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하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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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5-01
  • 목회단상 > 고속도로 휴게소와 교회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 지방으로 회의를 자주 다닙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며 휴게소를 들렸습니다. 한때는 가장 붐비는 경부선의 명물이었던 곳인데, 낙후된 화장실과 급감한 차량 숫자에 놀랐습니다. 반면 돌아오면서 지나친 휴게소는 단순히 화장실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복합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세월을 잊고 자리만 지키고 잠자면 불패의 고속도로 휴게소 신화도 깨어지는구나! 이전에는 휴게소 내 주유소는 값이 비싸 이용하지 않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렴한 기름값에 기회가 되는대로 가득 채우는 곳으로 변신했습니다. 어떤 곳은 저렴한 가격에 경정비, 세차, 편의점, 카페, 택배 서비스까지... 이런 곳은 어김없이 그 넓은 공간이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생존을 위한 변화가 있는 곳은 사람이 모이고, 잠자듯 세월을 잊은 곳에는 발걸음이 끊기는구나! □ 교회는 영적인 휴게소, 주유소와 같은 곳입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이 언제든 찾아와서 죄와 허물을 배설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더러워진 손을 씻고 세차를 하는 곳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가득 주유하고, 말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다시 힘내어 거룩한 대로를 달려갈 수 있도록 돕는 곳입니다.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영적 문화공간 역할도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잠자면 도태됩니다. ‘언젠가 좋아지겠지’ 하는 나태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안식과 채움을 줄 수 있는 영적 저장고가 되도록 예배와 기도를 살려내어야 합니다. □ 성도는 교회에 와서 성령의 기름을 주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주유구를 열어야 합니다. ‘아멘’이 주유구를 여는 소리입니다. 설교와 기도, 찬양을 통해 은혜를 주실 때마다 큰 소리로 ‘아멘’ 하고 주유구를 열어야 합니다. 주님께 드릴 주유비가 있을까요? 오직 ‘감사’로 값을 지불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주님은 성령과 말씀의 기름을 예배를 통해 꽉꽉 채워 주십니다. 엔데믹 시대, 신냉전 시대, 곳곳에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가면서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신부에게 신랑이 오듯이 주님이 오셔서 모든 수고가 그칠 날이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떨어지니 등이 꺼졌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 빛을 계속 밝혔습니다. 믿음은 밤이 깊을수록 밝게 빛납니다. 교회는 기름 채우는 곳입니다. 믿음의 등을 밝히고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성령과 말씀을 가득 채워야만 지치지 않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불확실한 세상에서 거룩한 길을 달려가기 위해서는 은혜의 기름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주유비는 오직 감사뿐입니다. 시작하면 가능해집니다.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 교회 오면 은혜받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감사와 아멘으로 성령의 기름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의 우선순위를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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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4-17
  • 목회단상 > 풍성한 삶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언젠가 누군가의 장기기증으로 6명이 '새삶'을 얻은 사례를 뉴스로 본 적이 있다. 의학 드라마를 볼 때, 한 번씩 장기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다. '장기기증'이라는 개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해야지...'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이번 주 주일 설교 말씀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누구나 죽는다. 불사신은 없다. 영원할 것만 같은 삶의 모든 부품들이 다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죽으면 다 끝'이라면 삶의 가치는 저하되고, 삶의 목적은 무난하게 살다 가는 것이나 혹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에 메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 중 혹시라도 죽음에 대해 사색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믿는 이 소중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이다. 사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죽음이 무겁고 어두운 주제 같지만, 죽음 이후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실히 믿기에 그리 두렵지는 않다. 본 적도 없는, 경험하고 온 사람도 없는 천국을 믿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가장 선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막상 장기기증 서약을 하려고 실행에 옮기니 내 마음에 불안함이 생겼다. '내가 이 서약을 하는 순간 죽음이 내 코앞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도, 사실 마음속에서는 이 세상을 더 살다가 가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토록 연약하다. 어쩌면 삶의 끝까지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할 예정이다. 주일 말씀을 참고하자면...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 너머의 영원한 구원과 우리 존재에 대해 생각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두게 될 때, 회개와 순종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성화가 촉진되며 하늘의 소망을 견고히 잡게 됩니다. " ?그래. 죽음을 가까이 둔 채로 살고자 하는 한 걸음으로, 주어진 시간들로 빛나고 풍성한 삶을 만들길 바라는 뜨거운 마음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해야겠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당장 부르시진 않으실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에! 그러나 분명하게 다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자. 죽는 그 순간에도 장기기증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자. 내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잊지 말자.  주(註): 이 글은 ‘죽음, 그 이후’ 설교를 듣고,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딸 아이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믿고 있는 바를 알리고자 소통하는 글을 본인의 허락을 받아서 올립니다. 고난주간,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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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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