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6(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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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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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 공동체의 발전과 행복을 가져오는 자세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분명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책임지는 자세입니다. 그것을 ‘주인의식’이라고 합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과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책임을 집니다. 예컨대,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며, 잔치가 잘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반면에 손님은 차려 놓은 음식만 먹습니다. 다른 잔칫집과 비교해서 맛 타령을 합니다. 일이 되든 말든 나와 상관없습니다. 편하고 부담 없기로 말하면 손님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발전하면서 누릴 기쁨과 영광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손님에게는 기쁨도 영광도 상급도 없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은 공동체는 발전합니다. 성도님들도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주인의식은 텃세를 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도, 짧은 기간 머무는 분들도 주인의식을 가지세요. ‘이 교회, 저 교회’라고 하지 말고, ‘우리 교회’라고 말하세요. 교회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자세로 섬기는 자에게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것을 ‘지체의식’이라고 합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데, 눈, 코, 입, 팔다리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지체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썩어서 죽는 것 아닙니다. 다 건강해도, 뇌로 가는 핏줄 하나 터지거나, 췌장 같은 작은 기관에 암세포 생겨도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원에 심은 소나무의 솔잎은 사시사철 푸르러 보기 좋았고, 줄기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거친 껍질은 영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거친 껍질을 다 벗겨내고 나니 속이 하얗고 말끔한 것이 목욕한 것처럼 참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소나무는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쓸모없는 것 같던 거친 소나무 껍질이 나무를 살리는 ‘생명 이불’ 이었던 것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생명 역사에 한 부분입니다. 누군가는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교회는 부자든 가난하든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지체의식을 가진 사람은 공동체를 통한 은혜와 축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됩니다.   셋째는 약한 자에 대한 배려의 자세입니다. 그것을 ‘가족의식’이라고 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6) 목만 부어도 온몸이 다 아프듯이, 아이가 열 40도를 오르내리며 끙끙 앓고 있는데, 부모가 코 골고 편히 잘 수 없습니다. 이마에 물수건을 대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은 가족입니다. “그 녀석 아빠 보다 잘났네”라는 말을 듣고 시기심을 가진 아빠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허물을 덮어줍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눕니다. 특별히 연약한 가족이 있다면, 더 배려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공동체가 약한 자를 향한 배려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 줄 수 있다면 더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예수님도 한 분입니다. 세상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며,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소중한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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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0
  • 목회단상 > 깨어있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어떤 일이든지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고, 또 한 사람이 맡은 역할이 가장 중요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 덕분에 성공하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과 저주가 들어왔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죄가 사하여지고 구원과 축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실패했고, 비느하스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도 했습니다. 9남 1녀를 자녀로 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새벽기도 시간 자녀들이 깊은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할 때면 아이들이 자던 방에 바가지로 물벼락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명의 자녀는 때론 하수구에서 갓 나온 생쥐 같은 행색으로 새벽기도에 나가야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어 보이지만 당시 자녀들은 참 감사하게도 잘 따라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자녀들을 깨운 후 목사님은 “한 사람만 깨어있으면 되는 거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답니다. 10남매는 지금도 그 음성이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자녀분들 모두 교회와 사회에서 훌륭한 분들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현재도 매일 새벽기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풍랑 만난 배에 탄 듯 멀미 나는 요즘입니다. 모두 깨어있지 않음이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할 내가 잠자는 것이 문제입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과 교회는 일어서게 됩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으로 인해 살아갈 소망 있는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고 하는 한 사람을 준비시켜 이스라엘 전체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 모세의 역할이 눈에 띄는데, 모세는 10번 이상 완고한 바로에게 찾아갑니다. 바로의 완고함은 극에 달했고, 노예 생활이라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성경의 이 부분을 읽으며, 한 사람 모세의 외로운 투쟁을 보았습니다. 누구도 모세의 투쟁을 도울 수도 없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모세의 몫이었습니다. 바로가 완전히 항복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짐을 지팡이 하나 짚고 외롭게 지고 나가는 모세를 닮고 싶어졌습니다. 바로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습니다. 그 앞에서 목숨 걸고 열 번도 넘게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모세는 꼭 예수님 같구나!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투쟁하셨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아~ 나도 모세와 같은 모습으로 서리라! 감히 모세의 길이 공감되면서,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을 사명으로 받아서, 외치고 또 외치며 이 길을 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그 음성을 나누고 싶어 주보에 옮겨 봅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시작됩니다. 모세와 같은 한 사람! 그렇습니다. 단 한 사람입니다. 오늘 세대 통합 예배를 드리며 오래 꿈꾸어 왔던 비전 스쿨의 출발을 선포합니다. 현실은 큰 산과 같지만 그래도 저는 외롭지 않습니다. 모든 교우 분들이 지지하고 함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모세와 같은 그 한 사람의 자세를 가진다면 곧 꿈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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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목회단상 > 마음을 지키는 방법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사람의 마음은 넓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도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마음보다 큰 것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클까요? 온 우주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면 채워집니다. 자족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또 다른 영토입니다. 그 영토를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평안할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23:7)이라 했습니다. 종일 하는 생각이 그 사람됨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열정과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밝아지고,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엡3:20). 하나님은 좋은 생각들을 계속해서 품게 하십니다. 자기 능력과 환경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계획들을 마음에 품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이루게 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3).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약할수록 더욱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이겨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을 때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생각은 패배자의 생각이 아니라, 승리자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골리앗을 이기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장수들은 누구도 골리앗을 이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다윗만이 하나님의 계획을 마음에 소원으로 품고 나가서 이긴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 너머에 있는 계획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가족이 아파도, 슬픈 일을 당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수1:9)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생각을 오염시키고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을 주는 문제들은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대신 이기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 소원을 비전으로 품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 마음을 품는 것을 마귀는 싫어합니다. 계속 염려와 두려움과 의심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도록 마음을 공격합니다. 마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잠4:23)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거룩한 것, 귀한 것, 복된 것만 받아들인다. 염려, 불안, 분노 이런 것은 다 물러가라.’ 이렇게 선포하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교회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품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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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3-08-30
  • 목회단상 > 가슴이 웅장해질 꿈을 품읍시다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교회)       부흥회를 앞두고 비를 구했더니 하루도 빠짐없이 부흥회 3일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내심 ‘하나님~ 혹시 잘못 이해하셨나요? 그 비 말고, 은혜의 비라고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3일 내내 흡족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저는 강사로 오신 임현수 목사님의 사역 규모에 놀랐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품으니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지는지 다시 확인했습니다.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품게 하신 소원이 있다면, 자기 능력이나 환경이 아닌 하나님의 크심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래전 미국의 한 소년이 호텔 보이로 일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자취방에 큰 호텔 그림을 붙여놓고 “하나님, 제가 이 호텔의 주인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기도와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꿈꾸고 기도하며 도전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15년 후인 1949년 10월 소년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소년은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 각지에 250여 개에 이르는 호텔을 세웠습니다. 그 호텔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콘래드 힐튼”을 따서 힐튼 호텔이라고 지었습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이은태 선교사님이 처음 뉴질랜드에 갈 때 갖고 있던 돈은 100달러가 전부였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꿈과 비전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많이 낙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신 건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입니다. 지금은 수 백억원 이상 가치의 선교센터와 아카데미 빌딩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엄청난 규모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인물 다니엘도 소년 시절 바벨론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는 불운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뜻을 품고 지켜나갔습니다. 결국, 제국 내의 모든 박수와 술객보다 지혜가 10배나 더하여 총리가 되었습니다. 시기하는 정적들의 음모에도 그의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할 때,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다음날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으로 바뀌어도 다니엘이란 인물은 여전히 건재하였습니다. 히스기야왕 역시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벽을 향하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은 15년 생명을 선물로 연장하여 주셨습니다. 야곱도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고통의 이름 야곱을 축복의 이름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실 ‘통일’을 품게 되었고, 그날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해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가슴 웅장해지는 꿈을 품고 기도하며, 그 꿈을 향해 도전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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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3
  • 편견의 산을 넘어서
    어떤 여인이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중 3명은 청각장애, 2명은 시각장애, 1명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홉 번째 아기를 임신 중이지만 성병에 걸려있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낙태해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음악 천재 ‘베토벤’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투표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3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후보 A :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후보 B : 두 번 회사에서 잘린 적이 있고,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 이 있고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 후보 C :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 후보를 택하셨습니까? 후보 A는 루즈벨트, 후보 B는 윈스턴 처칠,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라고 합니다. 선입견(편견)은 인간이 가진 못된 생각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실수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 가난한 집 아이가 먼저 의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던 중, 보자기에 가득 담긴 부정한 것들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먹으라 했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부정한 것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먹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그들에게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Ice breaking - 얼어붙은 생각, 즉 편견을 깨뜨리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편견을 깨뜨리고 고넬료의 집으로 갔을 때,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수백 년 동안 편견으로 인한 멸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가셨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후에 그에게 감사한 유일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으신 사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행1:8). 사마리아는 유대 땅과 가장 가깝지만, 편견 때문에 땅끝보다 멀고 어려운 곳입니다. 가깝지만 오히려 더 멀고 불편한 사마리아 같은 관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품고 넘어서면 땅끝까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더 깊고 풍성한 관계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관계를 품고 넘을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신 분입니다. 결국 내 안에 수많은 편견도 예수로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 바람, 성령 바람으로 편견과 오해를 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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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3-08-09
  • 떡과 부스러기 은혜
    사람들은 자랑할 것을 만들기 원하고, 끊임없이 자랑하며 살기 원합니다. 집, 자동차, 학벌, 직장, 자녀, 자녀의 성적, 집안 등 수많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누군가 그것에 대해 질문해 주길 바랍니다. 심지어 질문을 유도하기까지 해서 자랑하고야 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가장 큰 자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두로 시돈이라는 이방 땅으로 가셨을 때, 그곳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이방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주시길 구하며, 완벽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에 ‘주’라는 말이 붙으면 이것은 단지 상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대한 고백이 이방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한 가지를 질문하시며, 이 여인의 신앙을 테스트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 사용하시는 말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향해 자주 뱉었던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나옵니다. “주여 옳소이다” 이것은 이 여인의 겸손이기 이전에 그의 영적 인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그처럼 의미 없고 덧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이 말하는 부스러기는 무엇일까요. 이 여인은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는 것을 부스러기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이 인식하는 소중한 떡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입니다. 하나님과의 축복된 관계에 들어가는 것, 그것은 이방인으로서는 꿈꿀 수 없는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정작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로마를 이기는 힘이었습니다. 그런 힘은 사실 부차적인 은혜였습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특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쳤습니다. 욕심이 가득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방 땅에서 이름도 모를 한 여인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축복하십니다. 여인의 딸을 고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떡도 가지고 부스러기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떡과 부스러기 은혜를 좀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떡은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축복의 선물들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부스러기 은혜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많은 것들을 자랑하되, 우리의 최고의 자랑, 평생 자랑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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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3-07-26
  • 목회단상> 기도의 높은 산에 오르길 소망하며
    대학시절 친구들과 높은 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산 아래 민박집에서 잠을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산행하여 정상에서 일출을 볼 계획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일어나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너무 깜깜한 탓이었는지 중간에 길을 잃었습니다. 길은 사라지고 어둠과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을 찾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니 골짜기라 다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니 날이 밝았습니다. 길찾기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해서 올라가는 길만 택했습니다. 어느 지점에 도달한 순간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위치 파악이 되었고 곧 길을 찾았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면 사방이 보입니다. 신앙도 내려가면 안됩니다. 기도생활도 자꾸 내려가면 안됩니다.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오르면 동서남북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산 아래의 모순과 난관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높은 산에 올라서면 사방을 초월합니다. 세상의 모순과 난관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와 가야 방향이 보입니다. 기도의 높은 산정에 오르길 소망합니다. 높은 산이 있으면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보통 야산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만 계곡에 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계곡물이 그치지 않고 흐릅니다. 산이 더 높아지면 내리는 비가 차곡차곡 눈으로 쌓여 하얀 설산이 됩니다. 이렇게 높은 산은 가물어도 흘러내리는 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풍성한 생명이 소성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17:1) 거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홀연히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대화를 나누시는 광경이 감격스럽습니다. 제자들도 빛난 구름에 둘러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사람은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나 더 깊고 높은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영광의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역사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자칫 길을 잃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나라도 교회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의 높은 산에 올라야 합니다. 그 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길을 보아야 합니다. 기도의 높은 산에 오를 때에 사방의 모순과 갈등과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높은 산에 오를 때에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됩니다. 지금은 정말 중요한 때입니다. “기도를 쉬고 있는 자들이여! 깨어 일어나 기도에 산에 오릅시다.” 하나님은 지금 높은 산에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부름을 듣고, 기도의 산에 오르길 소망합니다. 그곳에서 우리 함께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뵈옵기를 원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3-07-19
  • 지금 불평하고 계십니까?
    어느 가정에 얼굴은 참 예쁜데 습관이 나쁜 세 자매가 살았습니다. 첫째는 게을렀고, 둘째는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고, 셋째는 불평불만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는 세 딸이 시집을 못 갈까 봐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마을의 부잣집에서 셋을 한꺼번에 며느리로 삼겠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큰딸에게는 일하는 사람을 여럿 붙여주고, 둘째 딸에게는 창고 열쇠를 주고, 셋째 딸에게는 매일 조석으로 만나 직접 불평불만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결혼이 이뤄졌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 친정아버지가 세 딸을 만나러 갔습니다. 게으른 큰딸은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기가 할 일이 없으니 참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둘째 딸도 온 집안의 창고 열쇠가 자신에게 있으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친정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불평을 들어주시는데, 그게 귀찮아 죽겠다는 것입니다. 게으름도 도벽도 고칠 수 있지만 불평하는 습관은 쉽게 고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불평을 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중심을 바꾸면 됩니다. 불평은 자기 중심성에서 나옵니다. 불평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 기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불평을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순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불평 대신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도 이 중심을 하나님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둘째 잊지 않고 기억하면 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깜빡깜빡 무언가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청년은 버스에 타자마자 휴대폰으로 뭔가를 부지런히 하느라 바쁘고, 아줌마는 택시에 타서 내릴 때까지 휴대폰을 찾느라 분주하다고 합니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 싶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 말들이 격하게 공감되며 서글퍼집니다. 기억하는 기능이 쇠퇴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아내의 생일, 결혼기념일 등 깜빡하면 혼나는, 그런 자극이 있음이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매주 성경 한 구절을 정확하게 암송하는 것은, 말씀을 되새기면서 뇌를 자극하여 기억력 향상을 도우니 일석이조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억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하라”라는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잊는 순간 우리는 불평합니다. 사람에게 입은 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성공했다는 건망증을 앓기 쉽습니다. 내가 어떤 은혜를 받고 살아왔으며,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호흡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은혜를 기억하면 불평은 사라지고, 다시 감사를 회복하게 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2)    
    • 칼럼
    • 목회단상
    2023-07-05
  • 인생의 철이 들면
    인생의 철이 들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후에 철이 든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희생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철이 들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철들게 합니다.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책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원하는 책을 사주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잠들었습니다. 머리카락을 팔아 아들의 책을 샀던 것입니다. 아들은 삭발모정에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사랑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랑을 알게 될 때부터, 철이 드는 것이죠. 성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살과 피, 곧 생명을 주신 사랑 앞에서 인생의 철이 드는 거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오늘은 2023년 상반기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는 상반기 누려왔던 은혜와 하반기에 베푸실 은혜를 기대하며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감사해야죠. 왜냐하면, 환경이 변할 뿐이지 하나님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일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사람 관계에서 상대방의 수고를 알면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 청소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고맙습니다. 땀을 흘리며 교회 청소하는 모습이 귀합니다. 교회 구석구석에서 늘 수고하시는 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의 눈에는 교회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주 등록한 새가족도 존재 자체로 소중합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의 길동무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살면 행복해집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보다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주인은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불평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나중에 온 사람이 은혜를 입은 것이지 먼저 온 사람이 피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품꾼의 자세는 감사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순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은혜롭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피해의식도 나오고, 올바른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불평은 공동체를 죽이는 독입니다. 불평은 자신과 주위가 생명력을 잃게 만듭니다. 불평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불평하는 혀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고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불평도 까닭이 있기에 사람들이 동조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공동체는 행복합니다. 우짜든지 행복해야지요.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믿음의 감사를 해야 합니다. 고난과 위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요셉은 억울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감옥에서 감사하고 기도했습니다. 힘들수록 불평 대신 감사하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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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3-06-28
  • 목회단상 > 교회 주변은 꽃밭입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녹던 어느 토요일, 두 분의 집사님께서 교회 뒤뜰에 잡초를 싹 벤 후에 유실수를 심었습니다. 그 나무 뒤편으로 이름 모를 노란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예쁜 꽃밭이 되었습니다. 잡초들로 무성했던 언덕이 꽃밭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교회 주변의 들판도 노란 꽃과 하얀 꽃이 어우러진 꽃밭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잡초와 잡목으로 무성했는데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코스모스도 아닌 것이 국화도 아닌 것이 신기해서 ‘도대체 너 이름이 뭐냐?’라고 꽃에게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름 모를 꽃이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아름다운 미래가 활짝 열릴 징조가 아닐까요.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이후 주변 빈 땅에 아파트와 편의시설들이 빠르게 들어서고 있습니다. 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산 화원이며, 교회의 아름다운 미래의 징조로 믿어집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축복합니다. 이런 자랑을 하고 다녔더니, 한 성도님이 제게 그 꽃 이름이 ‘금계국’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원산지를 따라서 ‘아메리카 코스모스’라고도 부른답니다. 이름을 알았으니, 검색을 통해 공부했습니다. 금계국의 꽃말은 “상쾌한 기분”이라고 합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게 해서 그렇게 지어졌나 봅니다. 금계국의 꽃말처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아지게 하길 소망합니다. 금계국의 개화 시기는 6~9월 여름으로 번식력이 매우 강해서, 이 꽃이 있는 곳에는 잡초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무 좋죠. 교회도 강한 생명력으로 척박한 환경과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크게 부흥하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코스모스와 국화 둘을 섞어 놓은 것 같은 금계국은 국화과의 꽃입니다. 꽃잎으로 차를 우려내면 청열 해독의 효능이 있어 열을 내리고 독을 없애고, 부어오른 상처를 낫게 하며, 꽃잎을 짓찧어 종기에 붙이면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보기에만 좋을 뿐 아니라, 속에 들어오면 깊은 영혼의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소박하며 우아한 모습의 봄꽃과는 달리 여름꽃 특유의 화려하고 당당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금계국의 자태는 볼수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를 들고 날 때마다 일부러 꽃에게 다가갑니다. 꽃은 만날 때마다 도도하고 예쁜 모습으로 자신의 꽃말처럼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 땅의 교회가 더도 덜도 말고 금계국처럼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족으로, 꽃 이름을 알려주신 성도님께서 “꽃을 보고 감격하는 감성을 가진 우리 목사님이어서 감사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더하여 “금계국”을 가지고 조금은 억지스러운, 그러나 우리의 희망을 담아 주보에 글을 실어 봅니다. 오늘은 예배 후 꽃을 감상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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